2025. 11. 10.(월) ~ 2024. 11. 28.(금) 실시된 「2025학년도 인권 표어 및 에세이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출된 작품들은 인권센터 내 인권전문가 및 관련 분야 전문 외부 위원을 포함한 심사위원이
인권의 의미, 구성의 적절성, 참신함 등을 중심으로 종합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최우수(1), 우수(1), 장려(3) 5개의 작품이 입상하게 되었습니다.
시상은 12월 10일(수)중 응모 시 입력하신 핸드폰 번호로 수상자에게 개별 연락드리며,
참가상을 포함한 모든 상품은 12월 18일(목)까지 전달될 예정입니다.
인권 표어 및 에세이 공모전에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타 문의사항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권센터 (☎02-3668-4164)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수상하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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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및 시상 내역 |
★ 최우수(1편, 200천원), 우수(1편, 150천원), 장려(3편, 80천원)/문화상품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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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서울지역대학 사회복지학과 백◌◌ |
‘새치기하는 노인’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으로
어렸을 때부터 노인은 나에게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조부모님과는 다른 지역에 살아 명절에나 잠깐 뵐 수 있었지만 그때 그 분들은 젊으셨고 내가 어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병 또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나에게 ‘노인’은 그저 길거리에 마주치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친구나 지인들에게 듣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동화 속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마주 퍼부어주는 존재로서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내가 마주치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서로 피해주지 말고 사회적인 매너를 지켜야하는 그냥 사람일 뿐이었다. 줄을 서지 않고 새치기를 하거나, 버스 안에서 큰 목소리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 “노인 혐오는 괜히 생기는게 아니야”라는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고 노인들은 ‘말 안 통하고 맨날 자기만 맞다고 해’라는 고정관념이 내 안에도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서 평소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버스가 오자 곧장 줄 맨 앞쪽으로 다가가 서서 버스를 탔다. 처음에는 ‘노인들은 새치기가 일상인가’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짜증이 올라왔다. 그런데 다시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의 풍경을 떠올려보니 그 노인은 한참 전부터 정류장 근처에 와 있었다. 줄이 생길 때 줄에 서지 않고, 눈으로 대략 순서를 확인한 뒤 조금 떨어진 벤치에 가서 앉아 계셨던 것이다. 그 벤치는 정류장과 거리가 좀 있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금방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을 다시 보니 다리를 살짝 절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그동안 내가 ‘무례하다’고 느꼈던 다른 노인들의 행동들을 다시 생각해봐야한다는 머리 속의 목소리가 울렸다. 줄 앞의 이어폰을 낀 학생에게 “내가 먼저 왔다고!” 하고 목소리를 높이던 분들, 한산했던 버스 줄에 버스가 다가오면 허겁지겁 어디선가 뛰어와 새치기를 했던 분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일부러 질서를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아픈 다리와 허리 때문에 줄에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몸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순번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큰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노인을 보면 ‘왜 화부터 내시지’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노년기에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생각해보면 청력 저하가 흔히 나타난다고 하니, 작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들의 큰 목소리는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한 공격이라기보다 단순히 ‘잘 안들려, 크게 말해줘’하는 뜻일수도 있었다. 내 귀에는 그저 거칠게만 들렸던 말들이 사실은 ‘무슨 일인지 나도 알고 싶어’라고 생각이 드니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 든다. 나는 방송통신대에서 사회복지학과에 다니고 있다. 복지에 대한 여러 시각과 역사를 배우지만 그 중 나의 이러한 경험과 연결되는 개념은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이 아닐까. 에이지즘은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나이만을 근거로 사람들을 편견을 가지고 보고 차별하는 태도를 말한다. 노인을 게으르다, 고집 세다, 불합리하다고 치부하는 사회적 시선은 그 사람의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에 대한 건 전혀 궁금해하지도 배려해줄 생각도 없다. 나 역시 버스 정류장에서 노인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건강 상태로 어떻게 힘들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인권의 관점에서 이를 본다면, 문제는 ‘줄을 섰느냐, 안 섰느냐’가 아니다. 인권은 인간답게 살 권리이며, 노인은 노인답게,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노년기의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노인을 위한 유엔의 원칙’에서는 독립, 참여, 보호, 자아실현, 존엄성이라는 다섯 가지를 제시하여 고령 인구가 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맞추어 각국에서 이 원칙이 현실의 정책에 반영되길 장려하고 있다. 내가 본 버스 정류장의 노인들은 바로 그 ‘독립’과 ‘참여’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다. 혼자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외출하고, 줄에 오래 서지 못해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이 사회에서 버스를 이용할 권리가 있고, 줄을 지킬 의사도 있다”고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이 젊은 세대의 기준에서 볼 때 다소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무례함’으로 해석해 버리는 순간, 노인은 공공 공간에서만큼은 민폐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노인을 ‘예외적 존재’로 보는 태도는 일상적인 인권 침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노인학대는 시설이나 가정에서의 폭력과 방임으로 주로 이야기되지만, 그 근원에는 노인을 열등하거나 부담스러운 존재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에이지즘은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도, “노인은 원래 그렇지”라는 말로 불편함을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노인 전체의 속성’으로 돌리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존엄성과 시민성이 서서히 지워진다. 버스 정류장에서의 나의 경험은, 내 안에 스며 있던 에이지즘을 자각한 작은 계기였다. 나는 그동안 노인을 시민으로 보기보다, 나의 편의를 방해할 수 있는 ‘잠재적 문제집단’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줄의 맨 끝에 서 있는 나는 내 순서가 중요했고 왜 노인들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도 안 지키는 것일까 하며, 줄에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몸을 가진 사람을 포함한 모두를 위해 공공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 경험에 인권의 개념을 넣어본다면 ‘공공 서비스와 공간은 노인의 신체적·감각적 특성을 고려해 설계되어 있는가’ 그리고 ‘젊은 시민인 나는 노인의 행동을 해석할 때, 그들을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고 있는가’로 정리해도 좋을 것 같다. 줄 서기 방식 하나에도,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존엄하게, 안전하게, 공정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기본 원칙이 시민 모두에게 자연스러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나는 노인을 만날 때 ‘예의’의 잣대만으로 서둘러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이 사람은 어떤 제약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지’ 한 번 더 상상해 보려고 한다. 나 또한 매일 늙어가고 있고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눈에 ‘무례한 노인’으로 보일 수도, 아니면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인권 감수성에 대해 인지하게 된 걸 감사하게 여기며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열린 마음의 어른이, 이전 세대에게는 나의 조부모님들께 못 전달한 다정을 조금이나마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부끄러운 소회를 밝히며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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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서울지역대학 국어국문학과 김◌◌ |
제목: 경로석 경험이 드러낸 차별의 민낯
어떤 공간은 사회의 무의식적인 편견과 차별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춘다. 지하철의 경로석, 바로 그곳이 나에게는 그러했다. 나는 62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로석은 늘 피하는 자리였다. 사람이 많든 적든, 그 붉은 좌석은 '자격 있는 자'만이 앉을 수 있는 무게감과 타인의 시선이라는 압박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는지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하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던 그날, 텅 빈 경로석에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나도 이제 62세인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합리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평화는 찰나였다. 다음 역에서 탄 한 어르신은 텅 빈 다른 좌석을 두고 굳이 제 옆에 앉아, 귓속말처럼 차별적인 언어를 던졌다. "애자니?" 순간의 모멸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야 했다. 심장은 쿵쾅거렸고, 뒤돌아서서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라는 격앙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한 무력감과 함께 수치심이 저를 덮쳤다.
이 사건은 저에게 경로석을 배려의 공간이 아닌, 심판과 비난의 자리로 각인시키는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교통약자 배려 문화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 첫째, 교통약자의 범위에 대한 사회적 무지 및 편협한 인식이다. 경로석은 단순히 '노인(老)'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교통약자를 위한 자리이며, 여기에는 노인, 장애인,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불편함을 겪는 모든 이가 포함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시민은 경로석을 '보이는 노인'만을 위한 자리로 인식한다. 특히 겉으로 불편함이 드러나지 않는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 장애인, 임산부 초기, 또는 저처럼 다리가 아픈 노인에게는 '자격'을 의심하는 시선을 보낸다. 나에게 "애자니?"라고 물은 어르신의 행동은,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보이는 약자'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 앉을 '합당한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는 편협한 인식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타인의 불편함에 대한 함부로 재단하는 '판단 문화'이다. 타인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문화는 무례함을 넘어선 폭력이다. 나에게 한 그 질문은, '네가 감히 이 자리에 앉았을 리 없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다름(Difference)'을 존중하지 않고, 쉽게 '틀림(Wrong)'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또는 자신이 '정당한 권리자'라고 착각하며 타인의 상황을 묻지도 않고 단정 짓는 행동은, 피해자에게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겨준다. 내가 느낀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경로석을 피하게 된 트라우마는 이러한 무례한 판단 문화가 낳은 직접적인 피해이다. 셋째, '양보'가 아닌 '특권'으로 변질된 경로석의 의미이다. 경로석이 배려와 양보의 공간이 아니라, 특정 연령층의 '특권'처럼 인식되면서 역설적으로 배려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었다. 문제는 '당연히 비워두어야 할 자리' 또는 '나이 든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진정으로 그 자리가 필요한 젊은 교통약자나 일시적 환자들이 눈치를 보게 만든다. 나아가, 나이가 많은 이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아픈가', '누가 더 늙었는가'를 따지는 내부적인 '자격 심사'가 발생하며 갈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경로석을 본래의 배려 공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인식 개선과 구체적인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교통약자 배려석' 명칭 변경 및 공익 캠페인 강화이다. 개선 방안으로 좌석 명칭을 '교통약자 배려석'으로 통일하고, 그 대상이 노인, 장애인, 임산부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불편함을 가진 모든 이임을 명시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공익 캠페인을 전개해야 한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함도 배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여,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 둘째, '차별적 언어'와 '판단'에 대한 교육 및 제재 마련이다. 개선 방안으로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차별적 언어나 모욕적인 질문을 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노인 복지관이나 경로당 등 노인 시설을 통한 교육에서 '경로석은 특권이 아닌 양보와 배려의 상징'임을 명확히 주지시키고,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존중 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 셋째, '묵묵한 배려'를 위한 환경 조성이다. 개선 방안은 경로석 주변에 '사연을 묻지 마세요', '우리의 불편함은 다를 수 있다'와 같은 문구를 부착하여, 섣부른 판단이나 질문이 무례함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은연중에 알려주어야 한다. 이는 타인의 사연을 캐묻기보다 묵묵히 그 자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경로석은 심판대가 아니다. 그것은 차별 없는 시선과 공감 능력으로 서로의 힘듦을 헤아려주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첫 번째 공간이어야 한다. 나에게 남은 아픈 생채기가, 우리 모두에게 인정과 존중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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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서울지역대학 통계·데이터과학과 곽◌◌ |
제목: 채팅창에 남겨진 침묵
지난 학기, 방송대 실시간 화상 강의 중이었다. 교수님이 복잡한 통계 개념을 설명하고 계셨고, 나는 열심히 필기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채팅창에 한 학우의 질문이 올라왔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아까 표준편차 부분을 다시 한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가 잘 안 돼서요." 그 학우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고, 프로필 사진으로 미루어 직장인처럼 보였다. 그 순간, 채팅창에 다른 메시지들이 연달아 올라왔다. "ㅋㅋㅋ 그것도 모르세요?", "강의 영상 다시 보시면 되잖아요", "진도 나가야 하는데..." 질문을 올렸던 학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은 채팅창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신 듯 강의를 계속 진행하셨다. 그 후 한 학기 동안, 그 학우는 단 한 번도 채팅창에 질문을 올리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당시에는 다른 학생들의 댓글에 끼어들어 그 학우를 옹호하지 못했다. 이 사건에서 느낀 첫 번째 문제점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이 주는 무책임한 언행이다. 대면 상황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조롱과 비난을 채팅창에서는 쉽게 한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니 상대방의 상처를 직접 보지 않아도 되고, 책임감도 희박하다. 두 번째 문제점은 학습 속도와 이해도의 차이를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태도다. 방송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각자의 선행학습 경험도, 학습 속도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한다. 세 번째 문제점은 나를 포함한 다른 학생들의 침묵이었다. 부당한 상황을 목격하고도 개입하지 않는 것은 방관이며, 이는 가해에 동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선 방안으로는 첫째, 강의 시작 전 디지털 에티켓 가이드라인 명시가 필요하다. 교수님은 매 학기 첫 강의에서 "모든 질문은 용기 있는 행동이며, 함께 배우는 기회입니다. 우리 강의실에서는 어떤 질문도 조롱받지 않습니다"라는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부적절한 채팅에 대한 즉각적 대응이 필요하다. 교수님이나 조교가 조롱하는 댓글을 발견하면 즉시 "여러분,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세요"라고 경고하고, 심한 경우 해당 학생에게 개별 연락하여 주의를 주어야 한다. 셋째, 실명 기반 채팅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발언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책임감 있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넷째, 방관자가 아닌 옹호자 되기 캠페인을 전개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부당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 "저도 그 부분 궁금했어요", "좋은 질문이네요" 같은 지지 메시지를 보내도록 권장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또 다른 사례는 조별 과제에서 일어났다. 우리 조는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한 분이 60대 후반의 여성 학우였다. 첫 조별 회의를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진행했는데, 메시지가 빠르게 오갔다. "저는 자료조사 할게요", "저는 PPT 만들게요", "그럼 저는 발표 대본 쓸게요". 그 학우는 한참 후에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한 조원이 "어머님, 그냥 자료 조사만 도와주세요"라고 답했고, 다른 조원은 "많이 부담 갖지 마세요"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 학우는 조별 과제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되었다. 자료 조사를 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최종 발표문에 이름만 올렸다. 과제를 제출한 후, 그 학우가 보낸 메시지가 기억난다. "여러분, 제가 많이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해요. 그래도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부끄러웠다. 이 사례의 문제점은 연령과 디지털 능력을 이유로 한 차별과 배제다. 우리는 겉으로는 배려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 학우를 동등한 조원이 아닌 '짐'으로 여겼다. 효율성을 앞세워 배제를 정당화했고, 그것이 차별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권센터가 명시한 5대 인권침해 유형 중 '차별행위'에는 "나이,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합리적 이유 없이 불리한 대우를 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우리가 한 행동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개선 방안으로는 첫째, 조별 과제 가이드라인에 포용성 원칙 명시가 필요하다. 교수님은 과제 안내 시 "모든 조원이 실질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특정 조원을 배제하는 것은 평가에 반영됩니다"라고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소통 방식 존중이 필요하다. 카카오톡만 고집하지 말고, 전화, 이메일, 화상회의 등 조원들이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병행해야 한다. 셋째, 역할 분담 시 강점 기반 접근을 해야 한다. 디지털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인생 경험, 전문 지식, 창의적 아이디어 등 누구나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찾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협업이다. 넷째, 중간 점검 시스템을 도입하여 교수님이나 조교가 조별 활동을 모니터링하고, 배제되는 학생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인권 침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채팅창의 조롱, 조별 과제에서의 배제, 디지털 능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물리적 폭력처럼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화면 너머에도 존엄한 인간이 있다는 인식, 다양성을 존중하는 디지털 시민성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 채팅창에 글을 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조별 과제에서 모든 조원의 목소리를 경청하려 노력한다. 그것이 방송대 구성원으로서 인권 친화적 학습 공간을 만드는 작은 실천이라고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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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서울지역대학 유아교육과 기◌◌ |
다양성은 '평' 화속에 '등' 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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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
서울지역대학 컴퓨터과학과 김◌◌ |
매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은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싣고 각자의 일상으로 향한다. 1분 1초가 아까운 일상길, 스마트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긴급 재난 문자 알림이 울린다. 지진이나 태풍 소식이 아니다. "현재 특정 단체의 시위로 인해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이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지각을 걱정해야 하는 짜증 섞인 '불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외쳐야만 하는 절박한 '투쟁'으로 다가온다. 최근 몇 년간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보장 시위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출근 시간대 지하철을 점거하고, 열차 출발을 지연시키는 방식의 시위가 이어졌다. 시민들의 발이 묶이고, 고성이 오가며, 때로는 물리적인 충돌 직전까지 가는 살벌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막연히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던 장애인들이, 나의 일상을 방해하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급기야 시위 장소와 시간을 긴급 알림으로 공지하며 시민들에게 우회 경로를 이용할 것을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나는 심각한 인권의 딜레마를 느낀다. 장애인 단체는 "우리도 남들처럼 자유롭게 이동하고 싶다"며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주장한다. 반면, 영문도 모른 채 출근길에 갇힌 시민들은 "나의 하루를 방해받지 않을 권리"와 "성실하게 살아갈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호소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이동권'과 '이동권'의 충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서로가 자신의 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타인의 인권을 볼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대화와 공감의 실종'이다. 현재의 상황은 서로를 향한 혐오와 배제만을 키우고 있다. 시위대는 과격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고, 시민들은 그들의 절박함보다는 당장의 피해에 분노하며 귀를 닫아버렸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접점조차 마련되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처럼 마주 보고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양보나 이해, 존중이 바탕이 되지 않은 권리 주장은 결국 힘의 논리로 귀결될 뿐이며, 이는 사회적 갈등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증가시킨다.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작된 외침이, 역설적으로 서로의 존엄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꽉 막힌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물론 엘리베이터 설치율을 높이고,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등의 실질적인 정부 정책과 예산 지원은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너진 신뢰와 갈등을 봉합할 수 없다. 제도가 하드웨어라면, 그 제도를 운용하는 시민들의 의식과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함께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나는 그 해결책으로 '역지사지의 체험과 교육'을 제안하고 싶다. 단순히 교과서적인 도덕 교육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는 실질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 시민들이 휠체어를 타고 환승 구간을 이동해보거나, 시각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는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하나를 타기 위해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답답함, 휠체어 바퀴가 승강장 틈에 끼일까 봐 느끼는 공포를 직접 몸으로 느껴본다면, 그들의 시위가 단순한 떼쓰기가 아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시위 주체들 또한 시민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 시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일상을 볼모로 잡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반자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과 직장 내 의무 교육에서도 인권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나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배제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를 성찰하게 하는 토론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
★ 참가작 중 50명 선정 커피 기프티콘 증정 예정.